지우 인생은 좀 고달픕니다. 학교 끝나면 학원, 학원 끝나면 또 다른 학원으로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를 보내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민구라는 형을 알게 됐습니다. 형은 볼 때마다 반갑게 알은척을 해 주었고, “놀면서 해도 돼.”, “인생 별거 없어. 신나고 즐겁게 살아.” 같은 멋진 말을 했습니다. 지우가 꼴찌 할까 봐 걱정 안 되냐고 물으면, 자기는 신나게 못 놀까 봐 걱정이랍니다. 아무튼 특이한 형입니다. 지우가 난생처음 엄마 몰래 학원을 빼먹고 친구랑 피시방에 갔다 들키고 말았습니다. 호되게 혼이 나고 집을 나왔는데, 갈 데가 없었습니다. 놀이터 구석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다들 행복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서운 생각들이 지우를 괴롭혔습니다. 때마침 민구 형이 나타났습니다. 지우가 친구 핑계를 대면서 피시방에 간 걸 후회하자 스스로 원해서 간 것 아니었냐고,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고 했습니다. 또 엄마한테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용서해 주실 거라는 말도요. 민구 형이 지우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아이스크림 가게랑 동네 책방 등 평소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지우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이르자 저 멀리 엄마가 보였습니다. 엄마는 지우를 향해 달리고, 지우도 힘껏 뛰어가 엄마 품에 안겼습니다. 아파트 숲이 빨간 노을빛으로 반짝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민구 형이 내 인생에 등장했다.
학교 앞에서 논술 학원 차를 타야 하는데 깜박하고 영어 학원 차를 타게 되었다. 둘 다 노란
색 차라서 헷갈린 것이다. 그것도 학원에 도착해서야 내가 차를 잘못 탄 사실을 알았다. 영
어 학원에서 논술 학원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한 번도 걸어서 간 적은 없었다.
쭉 가서 편의점 사거리가 나오면 왼쪽으로, 거기서 또 쭉 가면 오른쪽에 큰 빵집이 있고, 그
건물 3층이 논술 학원이다. 분명히 내 기억으로는 그랬다.
난 차에서 내리자마자 논술 학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 날 따라오는 형이 있었다. 바
로 민구 형이었다.
“너 학원 땡땡이 치는 거지?”
“아니거든!”
“야, 나도 땡땡이 치는 거야.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아니라고. 그리고 우리 엄마가 처음 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말라고 그랬거든.”
“난 너 처음 보는 거 아닌데?”
“날 알아?”
“마스터 영어 학원 다니잖아. 그럼 다 아는 거지.”
“그, 그런가…….”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땐 민구 형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넌 어디 가려고 땡땡이 치는 거야? 난 저 아래 숲마을 놀이터 갈 건데.”
“숲마을 놀이터?”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숲마을 놀이터는 공원 안에 있다. 나무로 만든 미끄럼틀과 터널이 있어서 재미나게 놀다 올 수 있다. 가끔 엄마, 아빠랑 가지만 오래 놀 수는 없었다.
“같이 갈래?”
민구 형 말에 가슴이 덜컹거렸다.
마음 한쪽에서는 민구 형을 따라가라고 말했다. 또 다른 마음에서는 엄마의 화난 얼굴이 떠오르면서 얼른 학원에 가야 된다고 말했다. 놀이터와 엄마의 얼굴이 동시에 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인생 별거 없어. 신나고 즐겁게 살아.”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아빠가 자주 하는 말이야.”
“그래서 형은 재밌어?”
“당연하지!”
순간 형을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의 화난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아, 안 돼…….”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나 먼저 간다!”
그러고는 민구 형은 멀어져 갔다.
‘한 번만 더 말해 주지…….’
그랬다면 나는 분명히 따라갔을 것이다.
- 본문 8~12쪽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