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서는 전학 와서 유일한 친구였던 짝 신우와 떨어져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다. 새로 짝이 된 아이는 반에서 제일 예쁘고 세련되지만 새침하기 이를 데 없는 채라. 멀뚱히 말 한마디 없더니, 민서의 예쁜 문구들을 보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민서는 아끼던 펜을 채라에게 주며 가까워졌고, 채라와 친한 무리인 도연, 희수와도 자연스레 친해졌다. 하지만 채라와 신우가 껄끄러운 사이라는 걸 알고, 신우와 오해까지 생기는 바람에 곤란해진다. 채라 무리는 민서에게 ‘패션 걸스’ 팀을 만들자 제안하고, 민서는 신우와 새 친구들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패션 걸스는 자기들만의 패션 노하우를 동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리면서 인기 몰이를 꿈꾸고, 독특한 물건이 많다는 이유로 채라는 민서에게 자꾸 뭔가를 사 오게 한다. 민서는 점점 자기가 물건 사다 바치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신우와 멀어져 괴롭던 차에 우연히 화장실에서 채라의 속마음을 듣고는 용기 내어 패션 걸스를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소품 담당 민서가 탈퇴하겠다는 말에 발끈하던 채라도 그동안 민서와 정이 들었는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민서의 물건에 끌린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민서랑 있는 게 좋다고. 이때 민서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유행(fashion)에만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 열정(passion) 가득한 사람이 돼 보자고. 또 우리끼리만 할 게 아니라 신우나 다른 친구들과 함께하면 조회수도 늘고 좋지 않냐고. 어느새 한마음이 된 네 사람은 ‘패션(passion) 스타’를 외치며 환히 웃는다.
다음 날, 교실에 들어서니 채라가 날 보자마자 물었다.
“너 언제까지 상자 준비할 거야? 상자가 준비돼야 동영상 찍지.”
“다음 주엔 사 올게. 아빠가 출장 가서 주말에 오신대. 오면 용돈 주신댔어.”
“어머, 정말?”
채라는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기뻐하는 채라 얼굴을 봐도 전처럼 가슴이 뿌듯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도연이와 희수가 찾아와 수다를 떨다 갔지만 전처럼 재밌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채라 무리와 곧장 교실로 들어왔다.
“쿠키 만들기 영상 언제 찍을 거야?”
희수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민서가 상자를 다음 주에나 살 수 있대. 그동안 상자가 팔릴까 봐 걱정이야.”
채라는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민서야, 내가 돈 꿔 줄 테니까 오늘 상자 살래? 돈은 다음 주에 나한테 돌려주면 돼.”
“응? 무슨 소리야?”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돈을 꿔서 상자를 사라니, 어이가 없었다.
“뭘 그렇게까지 해. 그냥 기다렸다 다음 주에 사자.”
도연이가 말했다.
“뭐, 나는 혹시나 그동안 상자가 팔리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런 거지.”
걱정된다는 채라의 말이 내 귀에는 거짓말처럼 들렸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시 동영상 얘기로 돌아갔다. 희수가 화장하는 영상을 다
시 찍고 싶다고 했다.
“나, 집에서 연습 엄청 했단 말이야. 이젠 잘할 수 있어.”
희수 이야기가 점점 멀게만 느껴졌다. 동영상 얘기를 할 때는 내가 끼어들 데가 없었다. 동
영상 만들기에서 채라나 희수, 도연이는 확실한 자기 역할이 있었다. 나는 소품 담당이라고
는 하지만 그건 나보다 내가 가진 돈만 있으면 되는 거였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들은 짝
짝이 모여 떠들고, 키득거리며 내 옆을 지나쳤다. 아이들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 본문 114~116쪽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