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사업이 실패하면서 일심이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었다. 그렇게도 자랑스럽던 아빠는 폐인처럼 지내다 요양원에 가고 일심이는 엄마, 동생과 다세대 주택 반지하로 옮겨야 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사립학교 모범생 나일심은 온데간데없고, 구질구질한 환경에서 끝 모르는 귀양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정붙일 곳 없는 새 학교에서 우연히 지적장애아 가득이의 마음을 사고 도움을 준 뒤로 모든 게 달라졌다. 어린이 명예 보안관에 임명되고, 선생님과 아이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면서 처음엔 밥맛없다고 일심이에게 이죽거리던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또 부잣집 도련님 가득이가 가진 환경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마치 자신이 가득이와 ‘왕자와 거지’ 놀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난 체험이 끝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 믿으며 자기가 만들어 낸 허상 속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 일심이! 자기의 모든 현실(이라고 믿는 것)에 방해되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혼내 주며 영웅 행세를 한다. 위태롭기 짝이 없던 일심이의 허상은 펑 터져 버렸고, 일심이는 달아나고 싶던 현실과 다시 마주한다. 다행히 선생님과 친구들이 손을 내밀어 주었고, 끝없이 괜찮다고 다독이는 엄마, 예전처럼 영웅은 못 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겠다는 아빠의 말 덕분에 일심이의 가슴속에 무언가가 꽉 차오른다. 다시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아무도 얕잡아 보지 못하도록 진짜 강한 상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손에 들린 보안관 명패가 새삼스레 눈에 확 들어왔다. 번쩍이는 명패가 내게 힘을 쑥쑥 불어넣는 듯했다.
‘좋았어. 한번 해보는 거야.’
나는 명패를 꼭 움켜쥐고 입을 앙다물었다.
잠시 후, 선생님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교탁 앞에 서자마자 보안관 얘기부터 꺼냈다.
“일심이 새 보안관에 임명된 거 축하한다. 앞으로 석 달 동안 멋지게 잘해 봐. 이건 우리 반 전체의 영광이기도 하니까 다 같이 박수 한 번 쳐 줄까?”
선생님 말에 아이들이 못 이기는 척 박수를 쳤다.
“일심이가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보안관이 됐다고 배 아파하지 말고 우리 반의 자랑이 될 수 있게 잘 도와줘야 한다. 선생님이 지켜볼 거야.”
선생님은 내 마음을 훤히 꿰뚫기라도 한 것처럼 듣기 좋은 말을 쏙쏙 골라서 했다. 이후에도 선생님은 ‘어린이 보안관’은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명예로운 자리라는 둥, 보안관 말은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는 둥 내 어깨에 힘을 실어 주었다. 몇몇 아이들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대부분은 진지하게 선생님 얘기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서서히 목에 힘이 들어갔다. 얘기를 듣고 보니 보안관 명패를 받은 게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건 신이 나를 지옥에서 날아오르게 하려고 달아 준 날개일지도 몰랐다.
- 본문 65~66쪽 중에서 -